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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 2009/06/28 18:09

마더는 독무獨舞로 시작해서 군무群舞로 끝이 난다.
춤은 괴로움을 잊으려는 속된 몸짓이다. 모성이 부리는 가장 속된 몸짓이다.
처음에는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하다 끝내는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괴로움을 잊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망각 이었다.
지독한 딜레마를 보여주는 영화다.
결론이나 설정에 관해 달리하는 얘기들이 있지만, 표면적인 것이 전부라고 믿고 싶다.
맹목적인 모성애 앞에서 죄의식도 없고 정의도 없다. 그 모성애로 인하여 마주하는 절망적인 삶에 관한 영화다.
모성애는 본질적으로 맹목적이다.
아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죽이기도 하고
반대로 아들을 살리기 위해 선악의 기준 따위 무시해버리기도 한다.
아들이 죄를 저지르지 않았을거라는 확고한 믿음에서 출발하였으나 아들이 저지른 죄를 대면하는 순간,
감정의 통제 아래 놓인 모성은 또다른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선악의 구분조차 가늠되지 않는 미숙한 이성이 죄를 짓고, 그보다 더 미숙한 감성이 죄 없이 벌을 받는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순수한 인간으로서의 죄의식과 정의관에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그것은 모성애에 의해 속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엄마로서 가지는 자식을 위한 맹목적인 사랑이 자연인 나로서의 삶을 절망속으로 내던지는 딜레마를 경험한다.
아무런 죄 없이 죄인인 아들을 대신하여 벌을 받는 아이는 그를 구해줄 엄마가 없다.
사회적, 보편적 의미에서의 선악이 결국 모성애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에 의해 결정되는 꼴이다.
얼마나 잔인한가.
무조건적으로 찬양되고 미화되고 이상화되어야 하는 집단적인 가치가 과연 존재할까.
엄마와 아들이라는 관계 역시 일종의 집단이고 그 속에서 기대되고 지켜야 할 역할과 가치가 존재한다.
가족이라는 것도 학교나 회사나 지역 집단, 국가와 마찬가지로 관계에 의해 생겨난 집단 조직일 뿐이다.
따지고 보면 개인 대 개인의 보편적 사회 관계 외에 다른 형태의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특별한 감성적 집단 성향을 가질 수는 있다.
집단적 가치들이 개인에게 맹목적으로 강요될 때 개인의 삶은 가장 절망적이고 잔인하게 희생되어야 한다.
엄마와 아들의 관계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맹목적인 모성애 밖에 남지 않아 그 간극을 메우고 있다면, 누구에게나 이와 같은 비극은 충분히 생겨날 수 있다.
엄마와 아들이 하나이고 다르지 않다는 인식은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음을 전제로 해야 한다.
맹목적인 모성애 만큼이나 영화가 보여주는 절망의 깊이가 깊다.
충분히 이해할 수 없을만큼 압도적인 영화 인듯하다.
이그나이트(ignite), Good Memories (Inst.) :: 2009/06/19 00:07
이그나이트(Ignite), 1집 Look So Good
01 Look So Good
02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니
03 괜찮아졌어
04 사랑은 왜 언제나
05 소풍
06 Delight
07 Cuz I'm sorry
08 So what
09 잘못 보셨습니다
10 Good Memories
11 Look So Good (Inst.)
12 소풍 (Inst.)
이 음악 참 좋네.
Inst. 를 먼저 들어서 그런가 보컬이 없는 게 더 나은 것 같다.
밴드인 줄 알았더니 솔로였구나.
웃긴 얘기지만 Ignite이라는 단어를 좀 좋아해서, 예전에 영어 공부할 때 글을 쓰면 꼭 한번씩 섞어 쓰곤 했었다.
naive 단어도 왠지 그냥 어감이 좋아서 좋아하는 단어다.
앨범의 다른 곡들은 아직 끝까지 다 들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이 음악은 참 좋다.
Steve barakatt 의 느낌. 세련되고 말랑말랑한.
앨범 소개를 보니까,
'나의 음악을 듣는 모든 이들이 행복해지길 바란다.'
좋은 말이다. 고마운 말이다.
어젯 밤에 안철수 교수님도 그렇고, 어제 오늘 나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ignite 하는 기회가 생긴다.
좋은 일이다. 작은 기회라도 긍정의 힘이 전해지도록 놓치지 말자.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이바디 :: 2009/06/13 23:00
이바디,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노희경 Book OST
01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02 Morning Call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노희경 작가의 에세이 집으로 발간이 되었다.
스무살 언저리에 처음 보았던 것 같다. 그땐 밑도 없는 페이소스 같은게 마냥 좋았던 시절이었으니까.
'.. 사랑 받을 대상 하나를 유기하였음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 유죄' 로 끝을 맺는 모양이다.
다시보니 기억에 있는데 기억에 남지는 않았다.
사랑없는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맹목적 옹호일 뿐이라해도,
사랑 받으려고 애쓰지마 그냥 너가 먼저 사랑해 라는 말이 결국 지독한 자기애라도,
또 다른 어떤 억지도 사랑없는 죄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스무 살에 이해하지 못했던, 그래서 기억에 남지 않았던 밑도 없던 페이소스가
서른 언저리에 들어가는 지금 내 삶을 그려놓은 밑그림이 되어 있어서 잔잔한 울림이 오래도록 들린다.
*
흐르는 시간속에 시들어갈 꽃들처럼
찬란한 순간 잡지 못해
마른 입술 건조한 눈에
남기지 않을 기억만
그리 아름다웠던 터질듯한 그 날들도
지나는 계절 돌아보듯
향기도 없이 웃을 수 있게
가벼운 손길 내밀며
I’m guilty of love
지나쳐갈 흘러가버릴 네 마음이라
영원이 아닌 바래갈 시간이라고
끝끝내 지켜온 이 초라한 외로움
마저 내주지 못한 마음만 남아
담담한듯 괜찮다고 텅빈 얼굴로 말을 삼키네
하나 비우지 않은 내 가득찬 이마음에
작은 그리움 품지못해
차마 누구도 되돌아 날 그리려 하지 않았네
I’m guilty of love
주지못해 받지 못했던 네 마음이라
나를 버리고 널 얻을수만 있었다면
나를 지켜내며 흘려보낸 시간은
혹시 그대에게도 외로웠을까
믿지 못한 내 사랑은 어쩌면 널 버렸을까
어쩌면 날 잊었을까
굿'바이, Good&Bye :: 2009/06/13 22:27

굿'바이(Good & Bye おくりびと)
'돌 편지. 옛날엔 말야. 문자가 없었을 때는 사람이 자기 마음을 닮은 돌을 주워서 상대방에게 전해줬대. 받은 사람은 그 돌의 감촉이나 무게를 가지고 준 사람의 마음을 헤아렸고. 예를 들어 화가 났을 때는 마음의 평화를 바라고 힘들 때는 상대방을 걱정한다던가 말야.'
예전 김훈 선생님의 글에서 죽음의 일상성에 관하여 읽은 기억이 있다. 살아가는 일에서 죽음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어나는 것과 같은 비율로 우리의 일상에 함께 있으며, 기존의 생명이 죽어없어지지 않는다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자랄 수 없는 것이기에 죽음이야말로 신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은혜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일상의 죽음을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죽음의 보편성이 개별성을 설명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어가는 보편적 인류의 삶이 일상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각각의 생명이 개별성을 가져 우리 모두로 하여금 살아가는 일상을 뛰어넘는 기쁨과 경이를 느끼게 해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편적 죽음이 개별적 슬픔을 어찌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다행히도 그 개별적 슬픔을 느낄 만큼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 본 적은 없다. 감히 짐작해 보건데 슬픔의 근원은 어찌할 수 없는 단절에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더이상 새로운 기억을 만들 수 없다는 영원한 단절, 관계의 불가능성이다. 세월이 흐르듯 슬픔도 흘러 먹먹한 그리움으로 남는 경우도 보았으나 그때에도 역시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은 남아 세월보다 더디게 흐르는 까닭이 된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소통할 수 없다는 일은 죽음만큼이나 슬픈 일이다. 뜻을 전할 수 없고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사실이 곧 죽음과도 같은 절망감을 느끼게 한다.
죽음의 일상성과 개별성에 관한 영화다. 그리고 슬픔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살면서 단절되었던 소통의 회복을 제시한다. 직업으로서 죽음을 맞이하는 일과 아버지의 죽음을 대하는 일은 슬픔의 색깔이 다르다.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의미에서 그 죽음은 새로운 생명과 대체되는 것이지만, 개인적으로 슬픔을 극복하는 힘은 그가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었던 소통에 있다. 영원한 단절이 아니라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애틋한 감정, 삶의 의지 같은 것. 그렇기에 아버지의 죽음은 아들에게 영원한 단절 그 슬픔을 넘는 의미로 다가온다.
덧. 원제는 '보내는 이'라는 뜻의 일어이고, 아케데미 수상은 Good and bye 로 되었는데 한국 개봉은 굿'바이다. '굿바이'라는 말이 사실은 가장 역설적이고 정치적인 말인 것 같은데, 진정한 의미에서 '바이'가 되려면 원수가 아닌 한 '굿'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내가 한 말은 아니고 어느 팝 가사의 내용이다.
잔잔한 느낌으로 오후에 본다. 슬픔이 이렇듯 잔잔한 일이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웃사이더, 외톨이 :: 2009/06/13 21:26
아웃사이더, 2집 Maestro
01 VJ 특공대 (Skit)
02 Zero to Hero
03 City Hunter
04 청춘고백
05 외톨이
06 피에로의 눈물
07 Therapist
08 Bleeding Luv
09 Skit
10 불만증
11 Luv Business
12 Face Off
13 Value Of The Man
14 음악 밖에 없어
15 Speed Racer (Feat. All Memberz)
MC Sniper better than yesterday 에서 처음 들었던 것 같다.
나름 힙합 쪽에서는 유명했었나 보다. 2집이 나왔네.
랩이란게 원래 빠른 거지만 가끔 twista 처럼 그저 무언가 들리는구나 싶은 소리를 듣고 싶을 때가 있다.
한국에서는 아마 아웃사이더가 제일인 듯 싶다.
영어도 없고 욕도 없고 청승맞은 사랑 타령도 없어서 마음에 든다.
근데, 아웃사이더의 외톨이라.. 정말 답없는 경우 아닌가.
루저의 근성 같은 느낌. 답없다.
아웃라이어, Malcolm Gladwell :: 2009/06/07 22:20

아웃라이어는 수학적 의미에서 다른 대상들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통계적 관측치를 의미한다. 성공학에서라면 일반적인 수준을 뛰어넘는 성공을 이루었던 몇몇의 소수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그들의 성공이 무엇에서 기인하였는가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책이다. 일반적으로 짐작되는 타고난 재능, 유전적 우월성 같은 것들이 개인적인 성공담으로 포장되기는 쉬운 일이나, 사회적으로 얼마나 많은 천재가 생산될 수 있는가 하는 측면에서 그들이 단순히 천재로 태어나서가 아니라, 성공하기 위한 개인적, 사회적 조건들이 존재하여야 함을 주장한다.
전체적인 느낌은 좀 더 대중적인 방향에서 블링크가 보이는 것 같고, 얼핏 검은 백조의 그림자도 느껴지는 듯 하다. 쉬운 책이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이슈들이 있어 정리해본다.
일 만 시간 법칙.
지하철 북으로 1일 30분이란 책을 구입한 적이 있다. 거기서도 나온다. 일 만 시간 법칙. 명사의 강연회 같은 곳에 가면 그런 분들도 간혹 언급해 주시기도 한다. 일 만 시간 법칙.
무언가에 잘하기란 쉽지 않다.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노력의 문제인데 이때 적용되는 것이, 그 일을 일 만 시간 계속해서 연습하면 그 누구보다 잘 하게 된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수준의 플레이어들 대부분은 이 법칙에 지배를 받는데, 물론 타고난 재능이 미치는 영향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재능이란 것은 일 만 시간의 노력을 좀 더 수월한 것으로 느끼게 해줄 뿐 - 예를 들면 향상 속도가 남보다 빠르면 더 열심히 노력하게 되는 것처럼 - 실제로는 모두가 일 만시간의 노력을 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 뿐이라는 것이다.
몸에서 이끼가 끼는 듯한 환상을 겪을 정도로 노력하지 않고 있는 삶이라 반성이란 것 조차 민망하다. 얼마전에 또 새로운 포지션으로 적이 바뀌어서 업무적으로 상당히 피로도를 느끼고 있었는데, 단순히 재능으로만 덤비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 전공의 의미는 단순히 학사 학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엔지니어의 생활을 하고 있으니 처음에는 배우고자 하는 의욕보다 기존의 엔지니어와 다른 시각으로 승부를 보아야겠다 오만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입에 베는 기술적인 표현들이 마치 나의 지식인 것 처럼 자만했고. 적어도 내가 하는 결정들이 어째서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지 누구에게든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부끄럽게도.
돈 버는 일 뿐만 아니라 평생 하고 싶은 일들 중에서, 이를테면 음악이라던가 글을 쓰는 일이라던가 하는 것들도 일만시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일류 수준의 아마추어가 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좋아하는 일에 노력도 없이 성과를 얻고 마음이 편하기를 바라면 안된다는 의미이다.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노력해야 하는 것이 단순한 진리이다.
실용지능.
흔히 아이큐라고 불리는 것은 지적재능인데 이것과는 별개로 성공을 좌우하는 것 중에 실용지능이라는 것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는 재능? 혹은 상황을 돌파하고 해결해 나가는 능력? 쯤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내게 절실히도 부족했던 것이 바로 실용지능이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벽에 가로막혔을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했는가, 상대를 움직이기 위해 설득하고 타협하는 과정을 거쳤었던가. 작가는 이것이 성장환경에서 습득되는 것이라 하는데, 예를 들어 가부장적이고 교조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한 친구들을 이런 능력이 부족하여 수동적이고 비관적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포기해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공감하면서 안타깝지만 이제부터라도 배워야 겠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원만하게 사회로부터 얻어낼 수 있을지 고민해보고 있다. 그것이 성격의 문제인지, 가치관, 습관, 말투, 행동, 외모, 지능, 학력 무엇이 바뀌면 그리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고 있다.
PDI Power Distance Index .
조직이론에서 배웠던 기억이 나는데 홉스테드의 권력간격지수를 비행기 사고와 관련하여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한국 사회와 그 속의 조직을 어떻게 이해 하는지, 수십년도 더 된 자료로 현재를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도 같으나 공감하는 면이 적지 않다. 타국에서 권력간격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의 조직에서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고 직접적인 의사전달을 원한다면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그걸 알면서도 일종의 오기 같은 것이 있어서 나는 타협하지 않았는데, 책의 결론은 그래서 사회가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성공이 어디까지나 천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사회적인 조건들 하에서 가능한 것이기에 그것을 인정하고 이용할 줄 알아야 함을 말하고 있다. 중요한 말이다. 개인이 조직을 바꿀 수 없다. 먼저 적응하고 이용하는 일이 선행되어야지만 개인의 성공도, 조직의 발전도 가능하다.
책을 쓰는 일은 참 매력적으로 보이는데, 대게 한 우물을 파신 분들이 동일한 주장을 여러 권의 책을 통해 하는 경우를 왕왕 보게 된다. 말콤 글래드웰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주제라기 보단 사회를 보는 시각이랄까.
혹 운이 좋아 연구를 하게 되고 내 얘기를 책으로 쓸 수 있게 된다면 아마도 나 역시도 죽을 때까지 한 가지 주장만 되풀이 하게 될 것 같다.
쓰고 나니 참으로 먼 얘기 같다.


